목차
1.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 리뷰
2. 믿기 힘들 정도로 가난해진 일본
3. 일본과 미국의 금융 비즈니스 모델 차이
4. 일본은 언제까지 엔화 정책을 유지할 수 있을까
5. 경제 패전, 디지털 패전, 코로나 패전: 일본인은 언제 눈을 뜰 것인가?
회사 동료들,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어렸을 때 각자 재밌게 보았던 애니메이션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오늘날의 MZ세대 중 과연 한 명이라도 일본 만화책, 음악,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고 자란 사람도 있을까? 나도 그중 한 사람으로서 일본문화에 대해 여느 다른 친구들처럼 많은 관심을 가졌을 시기가 있었고, 지금도 한국인이나 일본인도 모두 저 멀리 바다 건너 있는 일본, 그리고 일본인에게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나라 기사에는 일본이라는 키워드가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꼭 클릭해서 읽게 되는 기사가 되었으며, 올림픽 때 한일 축구 경기전을 한다면, 우리나라 국민 어느 누구나 보게 되는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최근 인기가 많았던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그린 한산도 아마 그 연장선상에 서 있지 않나 싶다.
1960년대 베이비부머 세대에겐 일본이란 바로 우러러보던 '선진국'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옛날 할아버지가 부모님 어렸을 적 사 오셨던 일본산 시계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쌩쌩히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선진국이었던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한다니. 우리나라 국민에게도, 일본 국민에게도 충격을 가져다준 책이 아닐까 싶다.
"아베노믹스가 시행되기 이전인 2010년까지만 해도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지위는 훨씬 더 높았다. 그러나 아베노믹스 기간에 일본은 빠르게 가난해졌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1980년대, 90년대에는 전 세계에서도 위상이 빛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치는 1970년대 후반과 비슷한 수준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12 page)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
물론 일본이 선진국 반열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소리 소문 없이 이미 세간에 퍼지고 있던 이야기였으나, 이 책의 반향이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특히 크게 느껴졌던 이유는 일본의 저명한 경제 석학 노구치 요키오 교수가 썼다는 이유일 테다. 노구치 명예교수는 일본 히토츠 바시대 교수, 도쿄대 교수, 스탠퍼드대 객원교수, 와세다대 파이낸스 연구과 교수 등을 거쳐, 일본 경제론에 있어서는 대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분명 이 책을 저술하면서 일본 교수는 정말 뼈를 깎는 느낌으로 일본 국민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썼다는 것이었다.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자극적으로 느껴졌기도 하지만, 그만큼 이미 먼 미래를 예측하고 바라보았던 노구치 명예교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단어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암울한 심정이었을까.
책의 기본적인 명제는 지속된 30년간의 엔화 약세를 이끈 아베노믹스로 일본 경제 수준이 1970년대 후반 정도로 낮아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 저자는 두 가지를 꼽는다. 첫 째, 환율이 엔화 약세로 전환된 이후 약세에서 강세로 바꿀 수 있는 시장조절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배경과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임금이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시장조절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이유에는 일본의 국민이 잠시 진보적인 민주당을 뽑았던 적이 있었으나, 이 때도 민주당은 자민당과 별로 다르지 않은 엔화 약세 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당이 집권했을 당시에도 큰 경제 정책의 틀이 달라지지 않아서 일본 국민은 회의감을 느끼고 다시 자민당에게 지난 몇십 년간 표를 몰아주었다. 이를 보았을 때 국민과 노동자보다는 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는 보수당의 기업친화적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나, 노동자의 권익을 우선한다고 하는 민주당 조차 이러한 엔저 정책에 반기를 들지 않은 것이 노구치 교수가 느꼈던 일본의 자력을 잃어버린 한 가지 배경이었다.
그렇다면 왜 90년대 이후 일본의 임금은 오르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 기업의 이익이 늘어나므로 기업은 엔화 약세를 희망한다"라고 답한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엔화 약세 상황에서는 손쉽게 이익이 늘어나므로, 신기술 개발이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결과적으로 임금 역시 상승하지 않는다. 이는 '마약 같은 엔저 효과'라고도 할 수 있는데, 결국 엔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본을 가난하게 만든다.
환율이 엔화 약세로 돌아섰기 때문에 일본 엔화의 상품 구매력은 하락하는데, 이는 '엔저의 직접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엔저 효과에 따라 일본 기업은 기술개발이나 비즈니스 모델의 전환을 게을리하게 되는데, 이는 '엔저의 간접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엔저'라 할 수밖에 없다. (14 page)
믿기 힘들 정도로 가난해진 일본
일본의 빅맥 가격은 미국의 60% 정도에 불과한데, 이는 한국보다도 저렴한 가격이라고 한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일본의 저물가 기조를 유도한 엔화 약세와 금융완화 정책이 있었다. 일본은행은 2013년 '이차원의 금융완화(양정, 질적 금융완화 두 가지를 동시에 목표로 하는 정책)'을 통해 소비자 물가 상승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시장에서 국채를 매입했는데, 결과적으로 금리가 낮아지고 엔화 가치는 하락했다.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임금도 물가도 오르지 않았다.
다만 국채를 매입해도 일본 은행의 당좌예금이 늘어날 뿐, (은행 대출은 증가하지 않았기에) 자본축적은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엔화 약세가 이어지면 수입물가는 상승하고, 기업은 늘어난 수입 비용 일부를 국내 물가에 전가한다. 저자는 말에 따르면 엔화 약세로 인한 수입물가 상승은 이러한 결과를 불러왔다.
한편 수출물가 상승에 따라 기업의 이익은 늘어나지만, 기업은 임금 상승이라는 형태로 국내에 환원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기업이익이 늘어나 주가는 상승했다. 그러나 이러한 메커니즘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보니 노동자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기본 방침상 기업보다는 노동자를 지지하는 민주당조차 정권을 잡았을 당시 필사적으로 엔화 약세를 유도하려 했다.
애당초 '이차원의 금융완화'는 목적도 수단도 잘못되었다. 첫 번째 이유로는, 임금 상승을 정책 목표로 삼아야 하는 대신 물가상승을 목표로 정했다는 점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임금과 물가의 인과관계를 반대로 보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103 page)
몇몇 사람들은 일본에서만 살면, 임금도 낮지만 그만큼 물가도 저렴하기에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예를 들어, 기업이 실리콘밸리에 해외 주재원을 파견하게 된다면, 해외의 높은 물가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해외 유학생은 어떨까? 또한 노인 요양 등을 위한 필요한 노동력을 외국에서 불러올 수도 없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전문직을 하는 이들도 한국으로 와서 노동업에 종사하는 이유도 한국의 화폐가치가 자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낮은 엔화로는 해외 노동자들이 일본에서 힘든 노동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또한 세계 각지에 주재원을 둘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의 세계적 영향력도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다.
일본과 미국의 금융 비즈니스 모델 차이
일본의 예기된 경제 침체를 타파하고 임금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반드시 성장 견인형 산업이 등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규제 완화, 기초기술 개발, 인재 육성, 산업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가 특정 회사에 임금을 올리도록 요구하거나, 법인세를 감세하는 정책으로는 절대 실현되지 않는다. 노구치 교수에 따르면 "이 같은 땜빵 수준의 정책에서 당장 탈출해야" 한다고 한다.
일본의 성장견인형 산업 육성을 위해 본받을 수 있는 미국의 예시를 한 번 보자. 미국의 금융업은 어째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미국은 실리콘밸리의 IT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핀테크와 '임베디드 금융 (embedded finance)'를 통해 금융업, 정보산업, 금융 간의 융합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또한 저자는 내가 이전 블로그 포스팅(반도체 제국의 미래 (리뷰) - 정인성)에서 다뤘던 '팹리스'라는 새로운 형태의 반도체 제조업도 소개한다. 팹리스는 '공장이 없는 제조업'이라는 뜻으로, 과거 설계와 제조를 병행했던 기업들과 달리 애플, 퀄컴, 엔비디아와 같은 기술 선두 기업은 모두 팹리스로 설계만 하고 제조공정은 폭스콘, TSMC, EMS(Electronics Manufacturing Service)라는 기업에 맡긴다. 따라서 제조업도 일종의 정보산업이 된 셈이며, 애플이 경이로운 성장을 이뤄낸 원인도 팹리스화에 있다. 이를 보면 미래에 앞으로 얼마나 더 지적재산권이 중요해질 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일본이 왜 팹리스화로 흘러가는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했는지는 "반도체 제국의 미래"라는 책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혹시 아직 읽어보지 못한 독자를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본은 빠르게 발전하는 반도체 시장의 소비자 수요에 정밀히 분석하고 집중 개발하지 못하고, 기술의 완성도와 품질을 최고도로 향상하는데 집중하였다. 이와 반면 삼성은 소비자들이 꼭 필요하지 않은 고도의 품질 향상(절대 삼성이 그러한 기술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굳이 그렇게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에 집중하지 않고, 최고의 품질은 아니어도 소비자가 원하는 만큼의 기술과 값싼 가격으로 반도체의 경쟁력을 높였다.
일본은 결과적으로 자동제어기기, 센서, 현미경 등 공장자동화 솔루션의 개발 및 제조, 판매를 하는 대기업 정도로 국한되었다. 노구치 교수는 "이제 제조업에서도 공장이나 기계가 아니라 개발이나 설계 등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공장이라는 자본이 필요 없는 제조업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애플의 매출에서 부가기치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이유는 원재 로비 등 원가 비율이 극도로 낮기 때문이다. 이는 애플이 직접 제품을 제조하지 않고, 설계와 판매에 특화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 또한 전기자동차를 제조하는 테슬라의 부가가치는 하드웨어보다도 소프트웨어에서 나오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제조업은 물건을 직접 만들기보다는 정보 쪽으로 크게 바뀌고 있다. 아직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기업들이 등장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일본이나 한국의 국가 전체적인 평균임금이 미국의 60% 수준에 머무르는 이유 역시 산업구조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134 page)
일본 경제학자로서 노구치 교수는 일본 경제에 대한 암울한 경제 전망을 얘기하였으나, 결국 우리나라도 일본과 비슷한 인구 노령화 등 인구 특성과 산업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위에서 설명한 제5장의 핵심은 결국 한국, 일본 모두 미국과 같이 "자본 없는 자본주의"라는 산업구조를 만들어야 하며 단순히 고품질의 제조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닌 고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일본은 언제까지 엔화 정책을 유지할 수 있을까
200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적극적인 엔화 약세 정책이 시행되었고, 민주당 정권도 이를 지지하였었다. 다만 실질임금은 계속 하락하였고, 소비지출을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기업도 소비자에게 수입 가격 상승분을 전가하기 어려워졌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는 계속해서 판매 가격을 끌어올리기만 하면 소비자 수요는 줄어들고 경쟁기업에게 약한 가격경쟁력으로 인해 기존 고객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뉴스에서도 2021년 9월부터 '나쁜 엔저'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물가 인상 압박이 이어지면, 실질임금이 하락한다. 또한 기업의 이익이 감소하면 고용 기회도 줄어든다. 결국 기업과 투자자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더욱 큰 위험부담을 가져오는 것이다.
다행히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아직까지는 GDP 성장곡선을 그리고 있다.
현재 일본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 혹은 미국과 비교해도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 무렵과 비슷한 수준이다. ... 일본은 향후 OECD 평균치를 밑돌게 되어, 2030년 무렵에는 OECD 평균의 절만 정도로 추락한다. 즉 더는 일본을 '선진국'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한국은 그래프의 전 기간에 걸쳐 계속 성장하고 있다. 1960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의 11.9%에 불과했으나, 1994년에는 50%를 넘었다. 1998년에는 아시아 통화위기를 겪으며 38.1%까지 떨어졌고, 2009년에는 리먼 사태 영향으로 다시 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은 단기적인 영향에 그쳤으며, 지금 한국은 OECD 평균에 근접하고 있다. (260 page)
노구치 교수에 따르면, 과거 1960년대의 일본인들은 자유경제주의의 바람이 부는 것에 굉장히 염려했었다. 오히려 선진국이 되면 치열한 국제경쟁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개선을 외치는 목소리도, 1인당 GDP가 OECD 평균 아래를 향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경제 패전, 디지털 패전, 코로나 패전: 일본인은 언제 눈을 뜰 것인가?
책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제2의 패전인데도 위기감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노구치 교수는 현재 일본이 경재 패전, 디지털 패전, 코로나 패전을 연이어 겪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디지털청까지 설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디지털 전환을 위한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의 깨어있는 몇 안 되는 지식인으로서 조국의 미래를 통탄하고, 어떻게든 바꾸어보려는 노력이 보이는 제목이다.
이 책을 읽는 한국인의 시점에서는 어떻게 노구치 교수의 책을 읽어야 할까? 위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으나, 우리나라도 일본에 비해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앞서가는 것일 뿐 오히려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포스팅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했던 교육정책이나 사회보장제도 등 OECD 국가 중 가장 빠르게 인구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도 일본의 발자국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일본과 같이 '잃어버린 30년'이라든지, '헬조선'이라든지 지나친 자조와 회의적 시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의 실패한 정책에서 교훈을 찾고 우리나라도 적극적으로 성장 견인사업을 육성하고,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경제정책에 대해 더 알아보고, 우리나라의 향후 경제 전망에 관한 인사이트를 찾고 싶은 이들에게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을 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책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도체 제국의 미래 (리뷰) - 정인성 (0) | 2022.09.03 |
---|---|
문장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0) | 2022.08.05 |
공감은 지능이다 - 자밀 자키 (0) | 2022.06.09 |